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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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umoch 19-12-08 10:57 조회2,525 댓글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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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선물로 받지 못하면 자기 손해입니다. 대접하는 대로 대접을 받습니다.
아내를 여왕으로 대접하면 내가 왕이 됩니다. 자녀를 왕자와 공주로 대접하면 또 그렇지요. 친구를 귀족으로 대접하면 나는 귀족의 친구가 됩니다. 이렇게 오늘 나의 삶은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나의 변화를 사람들은 인색하게 대할 것입니다. 받아주지 않고 오히려 달갑지 않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미 그만큼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이들을 보고 놀라워하시면서도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지요. 자기가 할 일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내 일을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살 길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판단과 편견에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해야 할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고향에서 거절당하신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권능을 주어 둘씩 보내셨지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으로 보내셨듯이 이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불러 세상에 보내십니다. 가까이 부른다는 것은 또한 멀리 떠나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까이 가면 떠날 날을 준비해야지요. 머물러 거기에 만족하고만 있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변화산이 좋아 거기서 초막 셋을 짓고 앉아 있으면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하늘을 보았으면 땅도 보아야 합니다. '여기'가 행복하면 '이곳'에서도 행복해야 합니다. '산'에 올랐으면 그 산을 마음에 담아 그 어느 곳도 '산'이 되게 해야 하는 것이 그 선물의 의미이지요. 산에 가야만 산이 있나요? 산에 가지 않아도 늘 산에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산에 있어도 산에 있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고향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느 곳도 고향이 되게 해야 합니다. 늘 예배당에서만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어느 집에서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영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넘어섭니다. 그 ‘어디나’, 그 ‘어느 때나’입니다. 진리는 변함이 없으니 ‘한결같음’이지요.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사는 것은 그렇게 경계에 막히지 않고 자유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선생님은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십니다. 가까이에 있어야 합니다. 가까이 있음이 ‘착함’입니다. 착한 제자는 선생님 가까이 바싹 붙어 있는 제자입니다. 착한 자녀는 부모에게 ‘착’ 붙어 있는 자녀입니다. 그렇게 가까이 있을 때가 또한 떠날 때입니다. 멀리 있어 '떠남'은 행복한 떠남이 아니라, 도피이고 비겁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되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홀로 살지 않습니다. 늘 ‘함께’인 거지요.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라는 것은 그의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셔서 일하게 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사는 것이, 둘씩 짝을 지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생인 것입니다. 여름과 겨울이, 낮과 밤이, 기쁨과 슬픔이, 사랑과 미움이, 빛과 그림자가 그렇습니다. 다 나를 나되게 하는 은혜이지요. 오늘 나는 누구와 짝하고 살아가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차려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해 악한 귀신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어두움과 절망과 갈등과 혼란에 직면하고 그것을 넘어서 빛과 희망과 화해와 일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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