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와 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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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geum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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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3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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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 영원 영원하시도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계획하심이 놀랍고 놀랍다 놀라우시도다.
마음을 울리는 가사와 고백이 긴 여운으로 남는 가스펠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사건들, 상황들, 조건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과 계획하심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돌아볼수록 신비하고 멋진 일입니다. 내 몸이 아파도,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을 당하고, 실연과 실직과 부도와 곤경에 있어도 그렇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면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제자가 배신할 것을 알고도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고 축복하고 감사를 드린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올라가며 찬송을 불렀습니다.(막14:26)
예수님은 같은 대접에 빵을 적셨던 사람, 함께 한 상에 둘러앉았던 이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십자가를 받는 것은 억울하신 것이 아니라 그 제자가 화를 당하는 것을 안스러우셨던 것이지요. 유다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래서 영혼의 선생님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게 합니다. 떠나는 사람이 힘들지 않고 떠나보낸 사람이 힘이 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면 쉽습니다. 사랑을 떠나 미워하며 사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이것이 유다에게 있을 ‘화’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하도록 맡겨 주고 따라가야 하는데, 내가 사랑을 하려고 하면 미움이 됩니다. 유다의 선생님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사랑이 흐르지 않고 조건 때문에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는 사랑입니다. 이유가 있는 사랑은 이유가 떠나면 사라집니다. 사랑이 있어서 시작된 그것은 이유가 떠나도 남아 있습니다.
배신과 찬송이 공존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다시 한번 유다를 생각해 봅니다. 유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예수를 따르다가 그 분을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을까? 그러면서 내 안의 그러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또 생각하면 그러한 유다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위해 오셨다면 유다가 없이는 그 일이 일어날 수 없었고, 유다가 아니라도 누군가 그 일을 했어야 했습니다. 유다로 인하여 예수님이 예수님 되신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무엇 때문에 내가 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간다고 하였습니다. 원망도 시비도 없습니다.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감사와 찬송을 올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런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축복을 하며 감사를 하며 마지막 만찬을 나누십니다. 축복하며 주시는 것, 그의 살, 그의 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있는 것까지 다 내어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축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거절당하고, 내가 버림받는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축복과 감사일뿐입니다. 나의 살과 피는 주기 위해 있는 것, 나의 것도 그렇게 내 것이라 여기지 않고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그분의 뒤를 따르고 뜻을 쫓아 사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찬송을 부르며 감람산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이 없기에 있는 그대로 보고 따라가며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아갑니다. 결국 찬송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랑도 배신도 그런 나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감사와 찬송을 하는 오늘입니다.